리함
http://www.zoglo.net/blog/liguangren 블로그홈 | 로그인
<< 2월 2025 >>
      1
2345678
9101112131415
16171819202122
232425262728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나의카테고리 : 칼럼/단상/수필/기행

내 고향 여행(4)ㅡ연안의 땅우에서
2005년 10월 04일 00시 00분  조회:3437  추천:76  작성자: 리함
내 고향 여행(4)

연안의 땅우에서


리 함

1

우리 조선사람들로 무어진 조선의용군과 조선독립동맹이 연안을 떠나 동북진출길에 오른지도 어언 60주년이 된다. 60년전에 연안이란 바로 이땅에는 수백명에 달하는 조선의용군전사들과 조선독립동맹 맹원들이 활동하고있었는데 그들의 발자취를 좇아 연안땅을 밟은 때가 어제런듯싶다.
벌써 10여년전의 일이다.
아침 일찍 서안을 떠난 전용뻐스는 옹근 하루 낮을 달려 황혼이 깃들무렵에야 연안에 도착하였다. 1988년 10월에 공청단중앙은 서안에서 《항전시기의 청년운동학술세미나》를 주최하였는데 그들 일행 연안참관단성원중 나는 유일한 조선족이였다. 꿈결에도 그리던 연안이 아닌가! 나는 봉황산밑에 자리잡은 연안호텔 8층의 한칸에 행장을 풀어놓고 창문가에 다가갔다. 불야성을 이룬 연안성이 시야에 안겨들었다.
찰나 기적과도 같이 등불에 현란히 싸인 보탑이 신기루마냥 어둠속에 불쑥 나타났다. 좀 후에야 안바이지만 연안시에서는 우리 참관단일행을 환영하여 설명절이나 중요한 기념행사때에만 켠다는 보탑장식등불을 일제히 켜놓았던것이다.
이튿날 오전 8시 반 우리는 마침내 보탑을 얼싸안게 되였다. 연안시 동남쪽 연하강반의 가령산에 솟아있는 보탑은 그 높이가 44메터나 되는데 당나라때 세워진것이라 한다. 1937년 1월 13일 우리 당중앙과 중앙군위 등 지도기관이 연안에 들어선후 보탑은 연안의 상징으로 억만 로고대중의 마음속에 솟아올랐다. 보탑—연안, 그 얼마나 많은 열혈청년들과 혁명지사들이 구름떼처럼 연안으로 몰려들었던가. 그속에는 수백명에 달하는 겨레혁명자들이 들어있었다.
조선족으로서 첫패로 연안에 들어선 사람은 보안(섬서성 북단에 있는 오늘의 지단현, 당중앙과 중앙군위가 연안에 가기전에 자리잡은곳) 주재 조선인대표 김산과 홍군지휘원 무정 두사람이였다. 연안이 평화적으로 해방된후 그들은 당중앙과 홍군부대를 따라 연안에 들어섰었다. 김산은 특별초청을 받고 《중국인민항일군사정치대학》(항일군정대학으로 간칭)에서 일본경제학과 물리, 화학, 일본어, 조선어를 강의하였다. 무정은 팽덕회동지의 수하지휘원으로 있었다. 김산, 무정의 뒤를 이어 연안에 들어선 사람은 장학량장군의 수하군관으로 있었고 서안사변에 참가한 유일한 조선족청년 서휘이다. 많은 조선족들이 연안에 들어간것은 그후의 일이였다.

2

전용뻐스는 보탑을 끼고 산을 에돌아 아래로 내리더니 청량산을 거쳐 왕가평(중국인민혁명군사위원회와 팔로군총부 소재지였는데 모택동, 주덕, 주은래, 팽덕회, 엽검영, 왕가상 등 동지들이 일찍 이곳에 거주했었다.)에 자리잡은 《연안혁명기념관》에 이르렀다.
숭엄한 기분을 자아내는 기념관이였다. 1950년에 봉황산밑에 세워졌다가 1978년에 이곳 왕가평에 옮겨진 기념관은 건축면적이 5,500평방메터였다. 웅위로운 기념관 정문과 정원을 지나 기념관에 들어서니 당년의 연안생활속에 뛰여든 심정이였다. 기념관에 전시된 홍군동정로선도(1936년 2월—1936년 5월)와 동정항일사진들을 보노라니 《홍군동정가》를 높이 부르며 황하를 뛰여넘던 홍군대오, 그 대오의 진두에서 진격로를 열어재꼈던 양림동지가 용맹을 떨치며 걸어오는것만 같았다.
1935년 12월 23일부터 25일까지 당중앙은 섬북 와요보에서 회의를 열고 항일민족통일전선책략을 제정하였다. 회의후 당은 홍군대오를 이끌고 력사적인 동정과 서정 항일을 하였다. 그때 양림은 홍군 제15군단 75사 참모장이였다. 그는 2만 5,000리 장정 때 중앙군위간부퇀의 참모장으로서 앞장서 금사강진격로를 개척한 우수한 조선족군사지휘원이였고 살아서 섬북땅을 밟은 두 조선족가운데의 한사람이였다. 동정항일에서 또 선발영을 이끌어 황하도하선봉이 된 그는 황하대안점령과업을 수행하고 계속 진격하다가 불행히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는 눈을 감기전에 《전방형편이 어떻소? 주석께서 도하하셨소?!》하고 동지들에게 물었다.
《중국공산당전국대표회의》문물과 사진들을 바라보노라니 조선족 리철부가 조용히 미소짓고있는것 같았다. 1937년 5월 2일부터 5월 14일까지의 기간에 연안성내 대례당에서 중국공산당전국대표회의가 열렸을 때 당시 중공하북성위 서기 겸 천진시당위 서기로 있었던 리철부는 류소기, 팽진 등 동지들과 함께 이 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회의에서 한 두차례 발언에서 백색구역에서의 《좌》경페문주의오유를 신랄히 비판하였으며 대회기간에 모택동동지의 친절한 접견을 받았다. 참관자들의 흐름속에 끼여 천천히 발길을 옮기다가 《간부학교창설, 혁명간부양성》전시품앞에 와서 하마트면 소리까지 지를번하였다. 그것은 《조선혁명군정학교》사진 한장이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있었기때문이다.
1945년 2월 5일 연하강반의 라가평골짜기에 세워진 조선혁명군정학교에서는 근 200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학습하였다. 그들 대부분은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활약하던 조선인혁명자들이다. 화북과 화중의 여러 조선독립동맹 분맹과 의용군지대들에서는 중공중앙의 결정에 좇아 1943년말부터 조선인혁명자들을 륙속 연안으로 보내였다. 그들속에는 세살짜리 어린애를 업고 북평서 갓 온 녀전사도 있었다. 1944년 4월에 이르러 거의 모든 동지들이 연안에 집결하였다.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총부도 이곳에 자리잡았다. 민가가 없다보니 라가평은 사실상 조선사람마을이였다. 조선동지들은 이곳에서 정치, 문화를 배우고 군사자질을 높였다. 여기서 적들의 통치구였던 북평, 천진, 상해, 남경, 하남, 하북, 산동, 흑룡강 등 성과 시로 파견된 동지들도 적지 않았다.

3

오후에 참관단일행은 봉황산, 양가령, 조원을 돌아보았는데 양가령에서 받은 감격이 가장 컸다. 양가령은 연안성 서북 약 3킬로메터되는곳에 자리잡은 당년의 당중앙소재지이다. 양가령어구의 당중앙기관정문을 지나면 첫눈에 안겨오는것이 푸른 나무들속에 들어앉은 중앙대강당이였다. 1945년 4월 23일 오후 5시에 이 강당에서 력사적인 7차당대회가 열렸다. 조선사람으로는 박일우, 서휘 둘이 정식대표로, 최창익, 박효삼 둘이 방청으로 이 대회에 참가하였다. 그해 5월 21일 대회 21차회의에서 조선혁명군정학교 부교장이였던 박일우도 발언하였다.
중앙대강당왼쪽 뒤켠엔 담벽에 둘러싸인 중앙판공청 3층청사가 있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연안문예좌담회가 1942년 5월 2일부터 23일까지 이 청사에서 열리였다. 문예사업일군 90여명이 이 문예좌담회에 참가하였는데 저명한 조선족작곡가 정률성도 그가운데의 한사람이였다. 모택동동지를 모시고 찍은 사진에서 정률성을 찾아보는 나의 마음은 흥분으로 벅찼다.
중앙판공청청사를 지나 오른쪽산비탈에 접어드니 모택동동지가 거처하던 움집이 나타났다. 이 옛움집엔 한 조선족혁명가에 대한 이야기가 깃들어있다. 쏘련 연해주에서 온 로홍군 최정무는 1943년 2월에 연안에 들어갔다. 그때 그는 조선사람 들속에서 생산관리원사업을 하였다. 어느날 밤 남새마대를 지고 양가령에 들어선 최정무는 등불빛이 새여나오는 한 움집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모주석이 계시는 움집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자 그는 높뛰는 가슴을 진정할수 없었다. 그는 일찍 모택동주석의 접견을 받은 일이 있었던것이다. 1931년 11월 7일 강서 서금에서 제1차중화쏘베트공화국 로농병대표대회가 열렸을 때였다. 이 대회에 참석한 유일한 조선인대표였던 그는 모택동의 친절한 접견과 살뜰한 관심을 받았었다. 그는 꼭 모주석을 찾아뵈리라 마음먹었다. 헌데 아무리 통사정을 하여도 보초병이 들여놓지 않았다. 별 뾰족한 수가 없게 되자 그는 남새마대를 깔고앉아서 모주석이 문밖에 나오기만을 바랐다. 밤은 깊어가고 찬이슬이 옷을 축축히 적시였지만 등불은 꺼질줄몰랐다. 그는 끝없는 회포에 잠겨 꺼질줄 모르는 등불을 지켜보다가 어린애처럼 섧게 울었다. 그는 이렇게 모주석의 움집밖에서 하루밤을 꼬박 새웠다.
움집안에 들어서니 글을 쓰고 계시는 모택동주석의 사진(1939년)이 안겨들었다. 그 밑에는 당년의 책상과 필묵 등이 놓여있었다. 모택동주석께서 이 움집에서 쓰신 많은 저작중 《모택동선집》에 수록된것만 해도 40편에 달한다고 한다.
어느덧 2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사흗날 아침 8시 연안대교와 시구역을 벗어난 승용차는 귀로에 오른 우리를 싣고 곧추 연안비행장으로 달리였다. 차창밖으로 연안의 산과 들이 물결처럼 스쳐지났다. 라가평어구와 로신예술학원이 자리잡고있던 교아구어구, 중국의과대학 옛터어구가 달려왔다가는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잘 있으라 연안이여!
영원하라 겨레의 숨결이여!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91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391 상해 1차당대회 현지 찾아서 2011-07-01 6 9402
390 【장정발자취】(9) 홍군시절 거치어 온 엽평의 녹나무 2011-06-28 4 9237
389 【장정발자취】(8) 쏘베트 1차 대회와 겨레 한 젊은이 2011-06-25 11 7875
388 【장정발자취】(7) 서금 첫 답사지--엽평 옛터 2011-06-21 16 8348
387 【장정발자취】(6) 쾌속버스는 서금으로 달린다 2011-06-17 22 6731
386 【장정발자취】(5) 등왕각에 올라 전적지 굽어 보며 2011-06-17 21 7791
385 【장정발자취】(4) 남창봉기 곳곳에 발자취 남기다 2011-06-16 18 7151
384 【장정발자취】(3) 북벌영웅 김준섭렬사 모셔진 곳 2011-06-13 17 7954
383 【장정발자취】(2) 8.1 남창봉기 기념관 2011-06-11 25 8369
382 【장정발자취】(1) 영웅 도시--남창에서 2011-06-11 26 8542
381 김염의 미망인 진이녀사 모시고 2011-06-05 28 6125
380 옛 영화스타는 완령옥 아닌 원령옥 2011-06-01 49 4917
379 노오란 금사매 비속에서 피어난다 2011-05-23 56 5438
378 오늘은 기분이 짱입니다 2011-04-24 43 6329
377 3월 삼짇날 이야기 2011-04-16 46 5018
376 남장성--강남장성 어디에 있을까 2011-04-06 29 4626
375 19년 만에 가장 크다는 보름달을 두고 2011-03-20 35 4680
374 인생소감--이해도 뛰고 또 뛰여 보았다 2011-02-10 21 4837
373 추모(3) 친구가 가다니 믿을수가 없구려 2011-01-25 30 6918
372 추모(2) 모아산--문학친구들과 더불어 2011-01-24 39 5136
‹처음  이전 1 2 3 4 5 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